꽃이 진다고 그대를 잊은 적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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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0/09/01 하빈이 로봇 만들기 수강중
- 2010/09/01 두 마음
올 가을은 유난히 눈이 부십니다.
맑은 공기가 그러하고 높은 하늘이 그러하고 풀잎에 맺힌 이슬 방울이 그러합니다. 거기에 햇살은 ... 놀라운 사실은 이 모든 것들이 햇빛이 없을 때에도 눈이 부시다는 사실입니다. 심지어는 길가에 뒹구는 말라버린 잎조차 빛을 내고 있습니다.
온갖 총천연의 빛을 냅니다.
자연은 그러한데 건조하면 시작되는 내 피부는 다시 약과 주사와 보습제를 요구합니다. 벌써 발뒤꿈치는 갈라져서 피가 나기 시작하고 걸을 때마다 따끔따끔 신경이 쓰이기도 합니다. 그래도...
가을이 좋습니다. 따끔따끔 저 먼 발끝에서부터 가을이 왔다고 신호를 보내는 이 가을이 좋습니다. 눈부시게 아름다운 가을이 좋습니다.
새벽녘 허리쯤까지 차올라있는 배꼽을 간질이는 냉기가 좋고, 밤이면 풀잎에 기운 떨구고 마음만 하늘까지 가버린 그 가을이 좋습니다.
가을입니다.
눈부신! 참 눈부신 가을입니다.
처음 며칠간은 그저 손에 들고 만 다닌 것 같기도 하다. 그후엔 내 손에서 떠나지 않고 함께 한 녀석. 그리고 차곡차곡 나의 날들을 채우고 넘치면 비우고 또 다시 채워 나갔다.
그렇게 계절이 몇번 바뀌었다.
군데 군데 깨지고 칠이 벗겨진 곳이 더이상 눈에 거슬리지 않는... 편안한 사이가 되었다.
정이 들었나보다.
아쉬운 점이 영 없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더 마음이 간다.
간단한 것 같지만 늘상 우울한 생각에 빠져 허우적 거리는 것이 요즘의 내 모습이다.
그래서 가을 하늘을 많이 보고 또 혼자서도 많이 웃어본다. 미친 00 처럼...
웃는 셀카도 찍고 바탕화면도 웃는 얼굴로 바꿨다.
누가보면 자아도취에 빠졌다고 할만큼.
난 웃기로 한다.
하루키 무라카미 소설 1Q84 3권을 읽기 시작했는데 천천히 글을 충분히 음미해가며 읽을 참이다. 멋진 소설가다.
다리가 좀 아프긴 했다.
벽오동(백반정식 1인분7000원)에 들러 저녁을 먹었다.
카메라 베터리가 떨어져 음식을 카메라에 담진 못했지만 엄마가 좋아하셔서 나도 좋았다.
지난번 코스랑은 반대로 갔던 여행.
늘상 북천길로 통근하던 남편은 북천에볼거리가 없다고 가지말라고 하였다.
하지만 북천은 내겐 다른 의미다.
점점이 수놓은 듯 피어있는 코스모스와 희귀한 조롱박들. 그리고 메밀국수.
어제나 찾아가도 좋은 북천.
아침 일곱시에 일어나서
한시간 공원길로 해서 산책(?) 시간을 가지고
집 정리를 잠깐 한 다음
시댁에서 부추전 만들고 점심 먹고
두시쯤 집으로 와서 잠시 낮잠을 자고 책 좀 읽고
떡 주문한것 찾아서 다시 시댁으로 가서 저녁 먹고
어머니 텃밭 구경하고 회 먹고
집으로 왔다.
하림이가 호박죽 먹고 싶대서 호박죽 끓여주고...
가족들 모두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그 사이 전화 몇 통, 문자 몇 개 주고 받고.
지금은 밤 11시가 넘은 시간 비가 내리진 않는데 바람이 많이 분다.
한가위
아침 저녁으로는 추워서 긴 옷 하나 걸치고 산책 해야 하지만, 낮엔 아직도 여름이 무색할 정도로 덥다.
그런 초가을의 따끈따끈한 낮시간.
연암도서관에 들러 책 세권 빌리고 교회까지 걸어갈 요량으로 길을 나섰는데 길가에 버려진 냉장고 앞에서 한 노인이 고철을 떼어내고 있다.
정직한 삶의 모습이다.
가끔 월급의 액수를 보며 나에게 묻는다. '나 이 정도로 받을 만큼 일 했나?'
일한 만큼 버는 게 맞다.
그런데 열심히 일하지 않은 달에도 월급은 정직한 액수로 나오는데 나의 양심은 정직하지 못할 때가 많다.
들풀도 때를 지켜 꽃을 피우고 잎을 떨구고, 과일도 때를 지켜 영그는데...
유독 인간만 그 때를 모르는 듯.
산다는 것에 대해 나의 인생에 대해 생각한다.
미련이 있으면 그것에 넘어가게 되어있다.
우리는 예수 믿으면서 자동적으로 영생을 얻게 되었는데 이 파이프라인이 우리 인생에 들어왔지만 이것을 내 삶에 연결되어있지 않아서 하늘나라의 물이 공급되지않아 우리가 이미 길어놓았던 양동이의 물만 사용하고 있기에 고갈되어진다.
예수님은 공중의 새와 들풀을 보고 생각해보라고 하셨다.
주님은 생각 짧은 자를 믿음이 적은자라고 하셨다.
하나님이 나를 부르고 나에게 요구하시는 수준이 있는데 성공을 위해 나를 부르신 것이 아니라 '순종'하게 하시기 위해 나를 부르셨다는 것을 알아야한다. '교회는 순종을 가르치는 학교'이다.
성경에서 베드로에게 예수님이 요구하신 것은 깊은 곳에 가서 그물을 던지라는 명령에 대한 순종이었다. 주님의 말씀이기에 순종하는 것이 베드로가 해야할 순종이었다. 나중에 예수님은 지금은 네가 가고 싶은 곳으로 띠띠고 다니지만 나중에는 네가 양팔을 벌려 네가 원치 않는 곳으로 가게되리라 고 말씀하셨다.
그렇다면 순종이란 무엇인가?
'상황에 대한 순종'(찬송384장)
나의 갈길 다가도록 예수인도하시니~ 이 찬송의 작사가 F.J.크로스비 는 장님이었다.
영생을 소유한 사람의 모습은 대개 엉뚱한다. 세상의 가치와 다르다. 그들이 만난 하나님, 그들이 경험한 영생의 세계는 우리가 모른다. 모든 상황을 하ㅏ나님의 손길로 이해할 수 있어야한다. 아무나 그길을 갈 수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경험한 자 만이 갈 수 있다.
아무리 애를 써도 일이 성사되지않으면 그것은 하나님이 나를 막으시는 것이다 왜 나는 그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이기에.
하나님의 선하심,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어떻게 전달되는지를 지켜볼 줄 아는믿음. 때로 우리 인생에 걸림돌이 있고 안개가 있기도 하지만 하나님이 우리 인생에 섭리를 가지고 있음을 믿고 의지하라.
우리는 영운한 생명을 가진 사람이고 죽어도 죽지 않는 사람이다. 내가 살아있는 동안에 내 옆 사람에게 영원을 나누어주고 영원을 선물할 수있는 사람이 되라.
룻의 삶에 대한 깊은 묵상.
작은 마을 비천한 모습으로 살았지만 룻의 마음속에는 세계가 들어있었고 하나님의 나라를 소망하는 믿음이 있었다.
내 후손 내 이후의 자손에게 나는 행복과 유익을 어떻게 끼칠것인가?
죽은 자들에 대한 걱정으로 노심초사할 필요는 없다. 세상의 시간은 강물처럼 흘러간다고도 하고 인간이 늙어가는 것을 막지 못하는 것이 인간의 한계라고도 말을 한다. 얼마남지 않은 인생을 바라보며 한숨 짓는 것으로 인생을 바라보기도 한다. 예수믿을 때나 예수믿지 않을 때나 인생을 바라볼때 이런 똑같은 시각을 가지고 있다면 우리 믿음이 얼마나 허망한가. 우리가 시간의 한계에 갇히지 않고 시간을 주자하고 시간을 선용하는 삶을 살기를 바라야 한다. 구원이란 시간으로부터 건짐을 받는다는 것이다.
남강물을 바라보고 '물이 흘러가는 구나! 시간이 흘러가는 구나!'가 아니라, 지는 태양을 보고 "시간아 멈추어라 ,태양아 멈추어라"고 선언할 수 있는 것이 우리 인생의 모습이어야 하지 않을까?
예수 믿었다는 것은 시간을 잡았다는 뜻이다.
인생이 짧다고 하는 사람의 기준은 세상에서 내가 쾌락을 누리고 정욕대로 살기가 짧다는 뜻이다.
예수님은 33년의 인생을 살며 결혼도 하지않고 신성모독이라는 죄모ㅗㄱ을 쓰고 산챌 십자가에 못박힌 사람이었는데 예수님은 죽으면ㄴ서 마지막말로 '다 이루었다.'라고 하셨다.그는 시간이 짧다는 말을 하지않았다. 위대한 신앙 인물들이 모두 기운이 다하여 그 열조에게로 돌아갔다고 기록하고 있다.
예수님의 첫째 이적 혼인잔치의 물이 포도주로 변하는 그 기적은 시간을 에수님이 쥐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기적이다.
벳세다 광야에서 장정만 오천명을 물고기 두마리와 보리떡 다섯개로 먹였던 기적은 시간을 그가 쥐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말씀이다.
종교개혁을 일으켰던 마르틴 루터는 600페이지 이상되는 책을 100권 남겼고 그외 소책자는 이루말할 수 없다. 그러고도 그는 결혼하고 자식도 낳았다. 현대의 사람이 독일어로 평생 옮겨 쓰는것도 불가능하다고 한다.
헨델의 작품은 현재 사람이 그의 악보를 옮겨쓰기 위해 오선지를 긋는대도 평생을 그려야 한다고 한다.
예수님 루터 헨델 바흐의 삶과 일반인들과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시간을 통제할 수 있는 능력을 소유하였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인생을 허무하다고 표현하는 이유는 시간을 통제할 수없다는 좌절감에서 오는 고백인 것이다.
우리의 말하는 폼새가 나오미와 같고 룻과 같아야 한다. 탐욕을 취하는 인생은 얼마남지 않았으니 더 움켜쥘려고 하는 것이 우리 인생이다.그래서 나이가 들수록 더 탐욕스러워 지는 것이다.
다윗이 나이들었을 때에 신하들이 아리따운 동녀 아비삭을 구하여 다윗의 연수를 더욱 연장시키고자 하였을 때 그는 아비삭과 동침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자가 되었다. 젊은 날의 실수가 선으로 바뀌었다. 이제라도 영생을 소유한 사람의 생각과 언행을 품어야한다. 만일 가롯유다가 예수님을 은 삼십에 팔았는데 그는 예수가 여럿사람을 멸절시킬거을 기대하였는지도 모른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목적은 모든이 함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시기 위함이다. 이제 부터는 믿음으로 영원을 소유한 자 답게 살아야한다 더 멀리 더 깊게 더 높이 바라볼 줄 알아야 한다.
대회라기보다 학원들의 학생유치 행사 같은...
대회 참가비 2000원을 내고 화지를 받아 그림을 그리게 되는 진주개천예술제 그림그리기대회는 아이들의 순수 그림보다 학원강사들의 붓터치 실력을 평가받는 곳. 모두들 학원 강사 중심으로 모여 제출하기 전에 강사의 붓터치로 그림이 완성된다.
이런 대회는 애초부터 대회 방식을 바꾸어야하지 않을까...
주최측이 이 사실을 모를리 없을터. 일찍부터 아이들에게 편법을 가르치는 결과 밖에 되지 않는다.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하리라."
인간은 어찌하든지 간에 그 존재가 '사라진다'는 것이다. 우리들도 마찬가지로 우리 육신을 깎아 먹고 살며 육신을 허비하며 살아가고 있는데 그 사람이 떠났음에도 그 사람의 인생이 부각되고 여러사람이 그 헤택을 누리게 된다면 사람은 그것으로 자신을 남기게 되는 것이다.
지금 이 순간에 내 속에 생명이 있는가 보라 살아서도 생명이 보이지 않는 존재가 죽어서 생명을 가진다는 것은...
죽은 번데기에서 무슨 나비를 기대하겠는가? 앞으로 나비가 될것인가 그냥 썩어질 것인가 판단하는 것은 그 안의 생명이다. 그생명이 있어야 내가 죽어도 생명으로 살게 될것이다.
이따금 영혼이 없어 보이는 존재를 보게된다. 하지만 그전에 내 속에 생명이 있는가를 먼저 생각해야 한다.
'룻'이라는 여인! 그 여인이 어떻게 살았기에 그 속에서 다윗이 나오고 예수가 나왔는가?
다윗이 나오기 전에 룻에게 다윗의 영성이 있었다. 생명이 있었다.
룻에게서 나오미와의 대화와 그 후에 일을 결정하는 모습을 보고 그 여인의 생명을 확인할 수 있다.
나오미가 룻에게 자신을 떠나라고 하였을 때의 룻의 대답. 나오미와 룻의 영성을 돌아 볼 줄 알아야한다.
하나님을 존중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무겁게 받아 줄 아는 사람이고 또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이다.
'한나'라는 사람
그 사람은 믿음의 사람이었다. 하나님은 그 사람의 믿음 가운데 가슴 가운데 있는 생명을 보셨다.
한나의 남편 '엘가나'.
한나가 하나님께 기도할 때 아들을 주시면 하나님께 바치겠다 고 서원하고 아들을 얻었을 때, 누구보다도 기뻤던 사람이 엘가나 였을 것이다. 한나가 젖을 뗄즈음에 아들을 엘리에게 드리고자 남편 엘가나에게 말하였을 때에
"사무엘상 2장 11절 엘가나가 라마의 자기 집으로 돌아가고
율법적으로 아내가 서원한 것을 남편이 거절할 수 있었으나 그는 자식을 보내고 돌아갔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
내가 권리행사 할 수 있고 내가 거부할 수 있고 내가 말씀에 순종하여 돌아설 수 있는 것이 것이 생명이다.
내가 형통할 때도 내가 공포스러울 때 답답할 때 드렸던 절절한 기도를 드릴 수 있는 사람이 생명이 있는 사람이다.
어떤 사람이 처국에서 왕노릇할 사람인가? 처음부터 끝까지 단심가를 부를 수있는 사람 그 사람이 그러하다. 엘가나가 그러하였고 룻이 그러하였다.
그 생명이 나에게 있기를 기도하라.
자신을 극도로 억압하고 제한하며 살 수있는 사람.
지금 우리는 자신을 깍고 있다. 조각가이신 하나님께 나 자신을 드릴수 있어야한다.
우리의 생명을 깍아 타인에게 줄줄 아는 사람이 되라.
남을 돕는 방법에는 여러가지가 있습니다.
물질로 시간으로 힘으로 자신의 재능으로...그외에도 다양한 모습으로 남을 도울 수가 있습니다.
참 이상한 것이 돕는 일에는 꼭 보상을 기대하는 심리가 작용을 합니다. 내가 도와서 이렇게 저렇게 잘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생깁니다. 그 바람이 좀 지나치면 간섭이 되고 더 지나치면 실망하고 노하게 되기도 합니다.
어쩌면 이것은 당연한 심리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면서 한편으로는 남의 일에 감정이 그렇게 동요한다는 것이 이상하기도 합니다.
나는 남에 관한 나쁜 이야기 듣는 것을 좋아하지 않고 그런 자리엔 잘 끼지도 않는 편입니다. 남에 대한 관심이 적습니다. 그런데 조직내에 있을 때는 남의 일로 인해 나의 생활이 다소 불편해지기도 하고 힘겹게 되기도 합니다. 어울려 살아가는 세상에서는 어쩌면 당연한 일이기도 합니다.
이번에 동료의 일을 도우면서 그 동안의 나의 생활을 분명하게 깨닫게 된 것이 있습니다.
나에게는 무슨 일이든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경향이 있는 편인지 내 속에 어떤 일을 판단하는 마음이 생기기에 앞서 그 일을 긍적적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정확한 판단을 요구하는 일에 있어서 판단력이 많이 떨어지고 실효 없는 관계를 지속하는 경향도 있습니다.멈추어야지 멈추어야지 하면서도 기대를 버리지 못하고 관계를 지속하기도 합니다.
내가 속해보지 못한 환경 속에 있는 사람에게 끌리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입니다. 하지만 그 끌림이 결코 오래 지속되지는 못합니다. 사람은 자신이 속해 있어야 할 환경에 있을 때 편안함을 누리게 되며, 멀리 있을 때에는 뭔가 있을 것 같아 보였던 그것도 실제로 가까이서 보면 또다른 환경일 뿐이며 나와 다름에서 오는 끌림이 혼란으로 변하고 그 관계가 밀접할수록 실망이나 혼란은 더 큰 것 같습니다.
같이 부대끼며 지내야 하는 관계라면 어느 한쪽이 또는 서로가 맞추어 살아가겠지만 그럴 필요가 없는 관계라면 적당한 선을 유지하며 지내다 환경이 변하면 그 관계는 잊혀지겠지요.
나는 다른 사람이 속한 세상을 인정하는 일에 참 인색 했습니다.
하지만 이젠 인정합니다. 나와 다름을 인정할 수 있습니다. 나와 다르다고 틀렸다고 하지도 않습니다. 나와 좋아하는 것이 다르고 삶에 있어서 추구하는 것이 다르고 가치를 두는 일이 다르고...
그 모든 것들이 그저 다를 뿐입니다.
그것 뿐입니다.
예능 프로그램은 거의 보지 않는데, 얼마전 '남자의 자격'이란 예능 프로그램에서 넬라 환타시아 합창곡을 듣게 되었습니다.
아마도 내가 대학 다닐 때, 로버트 드니로와 제레미 아이언스가 주연으로 나온 'MISSION' 영화를 처음 보았습니다.
자신의 죄의 짐을 지고 절벽을 오르던 노예상 멘도사의 힘겨움이, 원주민에게 둘러쌓여 목숨이 위태롭게 되었는데도 오보에를 꺼내 연주를 하던 가브리엘 신부의 편온함이 생생하게 기억납니다. 그 영화보고 오보에 연주 테잎을 샀던 기억도 납니다.
내가 가진 것에 자족할 줄 아는 사람이고 싶습니다.
여기 직장으로 옮긴 후부터 직장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일이 많이 줄었습니다. 남에 대한 관심이 부족한 나의 성향도 있지만 이야기를 나눌 만한 마음 편한 상대가 없는 탓이기도 합니다. 그렇다고 시시껄렁한 이야기를 듣고 있을 만큼 시간이 한가한 것도 아니고, 남을 판단하는 이야기는 더욱 피하다 보니 동료들과 이야기 나눈다는 것이 인사 정도가 다 입니다.
일주일 정도 여럿이 함께 도와야 할 일이 있어 뜻하지 않게 여러 말을 듣게 되고 하게 되어졌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사람의 마음에 감사하는 마음이 없어지면 여유가 없어지고 자꾸만 남탓을 하게 되나봅니다. 남을 보며 나를 돌아봅니다.
넓은 도화지에 찍힌 작은 점만 보지 말고 넓은 여백을 볼 줄 아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그리고 항상 감사하는 마음을 지닌 사람이고 싶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받을 때 정상적인 경주를 하나님 앞에 해야 한다.
마태복음 4장에는 예수님이 40일 금식한 후에 시험 받으시는 장면이 나온다. 이를 예수님이 아주 민감하게 받아들이신다. 사탄은 배고프니까 이 돌들을 떡으로 만들어 그것을 먹으라고 말한다. 이에 예수님은 상당히 까칠하게 대답하시는데,
"사람이 떡으로만 살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살것이라"하시는데 어떻게 보면 이말씀은 기독교의 독선적이고 배타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듯하지만 이는 역사성이 있다.
이는 4000년 전에 뱀이 하와에게 나타나 선악과를 먹으면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하며 하와를 꾀는데 그말을 들은 하와가 선악과를 보니
"보암직하고 먹음직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게한지라"라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 그후 남편도 먹게 하였다. 그후인간은 태어날 때 부터 고통속에서 태어나며 힘겹게 살아가며 절망가운데 죽어야 했다.
그후에 하나님이 인간을 불쌍히 여겨 제2의 아담 에수님을 보내주셨는데
이에 사탄이 나타나 주려있는 예수님 앞에
독사 전갈이 있는 광야에서 더 강력하게 나타ㅏ나 예수를 시험한다.
이는 바로 첫사람 아담이 받았던 유혹이었다. 첫번째 실패를 만화하고자 하는 주님의 뜻이 있다.
왜 돌덩이를 떡으로 만들라고 하였나?
우리도 이것을 동일하게 시험을 받고 있는데 이 시험을 통과해야 하늘나라 갈 수 있다.
돌멩이! 예수님은 자신을 늘 돌멩이에 비유하셨다. 하늘로서부터 내려온 돌이라 하셨다.성전의 모퉁이 돌이라 하셨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도 '산돌'이라고 표현하신다. 우리는 지금 말씀의 '돌'을 맞고 있다.
돌멩이가 자신의 심경 골수를 찔러 쪼개고 있다.
사탄은 돌멩이를 변하여 떡덩이가 되게하라고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표피적인 감각을 즐겁게 하는 용도롤 사용하고자 하는 시험이 바로 이 시험이다. 왜 돌멩이를 던지느냐고 하나님께 항의하지 마라. 이 돌멩이가 우리 영혼의 심해에 던져져 영혼이 부서지고 회복되는 역사가 있어져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을 때 아프고 속이 부글부글 끓으면 그것은 제대로 말씀이 들어간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돌멩이를 맞은 것과 같다. 머리안아프게 해주세요 아프지 않게 해주세요 라고 하나님게 말하지 말고 말씀을 듣고 통곡의 소리가 있어야하며 탄식의 소리가 있어야한다.
말씀을 들었을 때 통회하고 자복하는 역사가 있어야 한다.
마타복음 4장에는 예수님의 씨 뿌리는 비유가 있다.
옥토는 씨앗이 떨어지면 씨앗을 품는다. 씨앗을 품는다는 것은 씨앗에게 수분을 주고 자신이 가진 모든 영양분을 씨앗에게 준다. 하지만 다른 밭은(길가, 돌짝밭, 가지밭) 씨앗이 자라지 못한다. 자신의 것을 내주지 않는다면 씨앗은 자라지 못한다. 옥토는 모든것을 씨앗에게 주고 그것을 위해 살게 된다. 그런데 옥토 가 씨앗에게 모든걸 주니까 그씨앗이 옥토를 변화시키는데 이제는 그 이름이 변하게 된다. 그 밭이 밀밭이 되고 보리 밭이 된다. 그 밭의 이름이 바뀌고 황금 물결이 출렁이는 대지가 된다. 너희가 나를 믿느냐 그렇다면 내 말이 들릴때에 말씀 따라 살겠다고 다짐하고 결단하면 얼마지 않아 그 사람의 삶이 하나님의 사람으로 결실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그대로 살았다면 우리는 천국의 향유의 향기로 살게 될 것이다. 하지만 말씀대로 살지 않았다면 우리는 그저 왔다 가는 인생이 될 것이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그런 인생을 살기를 원하신다.
돌짝밭의 돌은 우리가 신앙생활하면서 자기 나름대로의 신념 고집의 돌이다. 이것을 들어내지 않으면 옥토가 될 수없다.
가시라는것 나의 명예 면류관 같은거라서 그것을 벗어내리지 않는다면 하나남의 말씀이 자라지 못하게 된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마지막을 말씀해 주셨다.
베드로는 그 자신의 고집이 강한 고집덩어리였다. 그가 말씀받고 변화되었다.
우리무리 가운데도 변화되지 못한 베드로가 많다.
변화된 베드로는 풋내기 사도에게 질책을 받아도 일절 변명하지 않았다. 복음은 자신의 의지대로 하는 것이 아니다.우리가 몰라서 무지해서 자신의 의지와 신념과 의견을 주장하는데 이곳은 강도의 굴혈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곳이 교회이다.옥토라는 곳이 그런곳이다.내가 품으면 나중엔 그 말씀이 나를 품어 줄것임을 믿는다.나중엔 그 이름조차 바뀌게 될 것이다. 내가 그 말씀대로 살아보니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더라는 것을 체험하는 것이다.
다윗이 왕으로 있을 때 아들 압살롬이 반역을 일으켰을 때, 사독이 다윗을 위해 레위인들로 하여금 법궤를 가져오게 하였는데 다윗은 이에 대해 사독에게 엄히 명령하기를 제자리에 가져다 두고 레위인은 그 법궤를 지켰다.
법궤를 거기에 두신것은 하나님이 뜻이 있어 그곳에 두셨으며 하나님이 나를 도망하게 하심도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라 말한다.
하나님이 나를 보내시는 그곳에 가서 아멘 하는 그 성도가 옥토인 것이다.
내 스스로가 나를 경영하고자 하면 남는 것은 허망함 밖에 없다.
레이건 대통령이 저격 당할 당시 경호원들이 몸을 날려 대통령을 지킬수있었던 이유는 부담한 연습이었다. 우리가 말씀을 지키는 이유는 나를 위해 아들을 이 땅에 보내신 그 사랑에 보답하기 위해 말씀을 지켜내야 한다. 세상에서 날아오는 멸시 천대의 총알을 받아야한다. 말씀을 순종하는 것!
구원받은 자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이 나를 사용하도록 허용해야 한다.
줄거리: 잭 쿠퍼가 자신의 아 아내 로렐에게 39년 동안 수요일마다 쓴 편지를 그가 죽은 후에 그의 자식들이 발견하고 자신들을 향한 부모의 사랑과 부모의 삶을 알아가는 가족이야기.
느낌: 감동적이었다. 지금 나의 형편이 힘들고 지쳐있어서 그런지 진하진 않아도 잔잔한 감동으로 계속 그들의 삶을 돌아보게 하는 이야기이다. 어떤 이는 이글을 읽고 자신도 그런 편지를 쓰겠다 생각하였다는데 난 이여기 블로그에 나의 일상들을 좀더 세세하게 남겨야겠다고 생각했다.
훗날 하림이와 하빈이는 나의 삶을 어떻게 평가하며 또 나는 하나님 앞에 어떤 평가를 받을까?
나는 좀 복잡한 사람이다.
생각이 많고 재고 따지는게 많은 사람이다.
나는 시샘도 많다.
나는 자신감이 적다.
나는 좋아하는 사람들이 날 싫어 할까봐 두려워하는 마음이 강하다.
남에 대한 관심이 적다.그러면서도 남의 판단을 많이 의식하는 편이라 오히려 마음을 닫아버리고 타인의 소리에 귀를 막는 경향이 있다.
밝은 면도 있다. 하지만 그 밝음을 잃어가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나는 마음이 많이 약하다.
나는 남을 불편하게 하고는 하루종일 끙끙거리는 사람이다.
하지만 여전히 나는 죄인이다.
직장으로 아버지께서 오셔서 지금 어디 어디 와 있다고 하는 말을 듣는 순간, 네 목소리에 실린 너의 감정을 읽어내려고 무진 애를 써보았지만 너의 감정을 읽을 수가 없었어.
다만 아주 오랫만에 만났으니 많이 어색하고 서먹서먹 하겠구나 생각할 뿐.
무슨 이유에서 오셨건, 네 지금의 마음이 어떠하건 세상에 너와 연결된 끈이 있다는게 난 좋다.
다만 그 끈이 널 웃게 하고 뿌듯하게 하고 기운나게 하고 마음 풍족하게 하는 끈이었으면 하고 기도한다.
다행히 넌 유쾌한 시간 보내고 있다니 좋다. 한편 그런 너의 모습이 많이 낯설기도 하다. 이야기로만 들었던 관계와 실제 관계는 많이 다르구나 싶어서. 하긴 사람이 나 아닌 다른 사람을 안다는 건 어렵겠지...
어제 일과를 마치과 직원 회식이 있었습니다. 친구 옆자리에 앉으려고 가던 중에 자기 옆에 앉으라는 직원이 있어 뜻하지 않게 그곳에 앉게 되었는데...
선배 한분이 느닷없이 나에게 이렇게 말을 하는 겁니다.
"아는 사람 중에 못된 사람이 참 많네요."
내가 누구를 알고 있는지도 모르면서, 내가 아는 사람을 잘 알지도 못하면서, 그리고 내가 아는 사람에 관한 어떠한 이야기도 그 자리에서 말을 한 적이 없는데, 무슨 근거로 그런식의 말을 내 뱉는 것인지...
싸움을 할려고 해도 대화의 수준이 엇비슷해야 싸움이 되고 나이가 엇비슷해야 싸움이 되는데, 이건 순간 뻥 쪄서 그 나이가 되도록 왜 이런 말 밖에 할 줄 모르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들고 그 시간 이후로 자리 잘못 앉았구나 하는 후회가 밀려와 지금 까지도 그분 과는 얼굴을 마주 할 자신이 없습니다.
정말 그 사람 다운 발언이다 싶기도 하고 그 말을 여태까지 끼고 있는 나 또한 한심스럽기 까지 합니다.
말에는 힘이 있습니다.
그 사람 자신을 드러내는 힘이 있을 뿐아니라 다른 사람을 죽이기도 또 빛나게도 하는 힘이 있습니다.
타인의 말에서 배웁니다. 말을 통해 사람됨의 그릇이 얼마나 크고 작은지... 그 인격의 폭이 얼마나 넓고 좁은지를 판단하게 됩니다. 내 말도 누군가에게 평가 받을 것이며 그와 더불어 내 인격도 평가 받을 것임을...
사춘기가 다시 오려나 봅니다.
작은 일에도 마음이 상하고 기운이 빠지고 감상적이 되고...
오늘은 맘 넉넉한 사람과 눈 마주하며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