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
영원한 말씀 (이사야 4장 6절~11절)
미소1004
2010. 8. 29. 12:02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임했다는 것은 비둘기 같이 순결한 심령위에 성령이 임재한다는 뜻도 함께 담고 있습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마태복음 5장 8절)"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 하라"(8절)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하여 이 모든 자연현상이 이어지고 있으며 우리의 삶도 연장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창조의 질서의 말씀으로 오늘의 나도 이 자리에 있는 것이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하다.
엘리가 제사장으로 있을 때 전쟁이 일어났는데 그때 전쟁터에서 이스라엘군 4000병이 죽게되는 위기가 닥친다. 그때 전장에 장군으로 있던 엘리의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이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실로에 안치되어 있는 법궤를 가져오고자 한다. 그들은 법계가 이스라엘의 위대한 하나님의 승리의 도구라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레위 지파의 고핫자손들이 법궤를 메고 전쟁터로 나가게된다. 법궤를 본 이스라엘 백성들이 얼마나 감격을 했는지 땅이 진동할 정도라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 한편 이들의 반응과 상관 없이 블레셋군대는 전세를 몰아가고 있었는데 어찌 된 일인지 법궤가 있음에도 이스라엘 백성은 3만명이 죽어나갔으며 장군 홉니와 비느하스도 죽고 법궤마저 블레셋군에게 빼앗기며 군은 뿔뿔이 흩어졌다. 이 소식을 들은 엘리가 목이 부러져 즉사하며 그의 자부가 사산하게 되었다.
하나님의 임제의 상징인 법궤가 이스라엘의 승리를 상징한다는 그들의 믿음은 가상하게 보일 수도 있으나 하나님은 그들의 잘못된 신앙을 지적해 주고 있다.
법궤는 부적이 아니다. 성경이 있으니 믿음이 있을 것이다는 착각을 하면 않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을 육비에 새길 뿐 아니라 심비에 새기라 하셨다. 하나님을 믿으니 우리집이 잘 될 것이라는 생각은 잘못된 것이다.
말씀은 듣고 지키라고 주어진 것이지 부적처럼 쓰라고 주어진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우상처럼 부적처럼 사용하면 않된다. 성경을 잠잘 때 베고 누워자버리면 그 성경은 목침에 불과하다.성경은 부적이 아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법궤가 능력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상당히 잘못된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주어지는 이유는 듣고 순종하라고 지키라고 주시는 것이다. 말씀 때문에 우리가 그렇게된 것이라면 우리는 말씀대로 살아야한다는 뜻이다.
우선 적으로 우리의 모습을 살피때 세상 가운데서 우리의 삶을 먼저 살피라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한편 법궤를 가져간 블레셋은 그들의 신전 다곤 신 옆에다 법궤를 가져다 두었는데, 다음날 다곤 신이 넘어져 있는 것을 보았는데 다음날은 앞으로 꼬꾸라져 있고 피괴되었으며 그 지역에 독동이 퍼져서 그들이 회의를 하여 법궤가 이유임을 찾아내게 된다. 그래서 그들은 법궤를 이스라엘에 돌려주기로 결정한다.그들은 법궤를 수레에 실어서, 짐을 실어날라 본 적이 없고 젖을 떼지 않은 암소 두마리에 실어 벳세메스로 보내기로 한다. 그들이 가기는 가는데 그 소가 울면서 갔다. 마음도 갈마음이 없고 수레를 끌수 있는 기술이 없는 소 들이 그들이 베세메스로 곧장 갔다. 그것을 본 블레셋은 이스라엘 신은 당할 수가 없음을 인정한다. 이스라엘 땅이지만 블레셋의 지배를 받던 벳세메스 사람들은 수레를 몰고 자신의 성으로 돌아가게된다. 법궤를 본 벳세메스 사람들은 번쩍거리던 법궤를 들여다보고 열어보기로 결정한다. 모세 당시에 만들었던 법궤를 그 후에는 본적이 없었는데 그들은 안을 들여다보고 싶은 호기심에 뚜껑을 열었는데 여는 그순간에 즉시 70명이 그 자리에서 죽게 된다.
법궤 뚜껑을 열어서 죽게되었다. 그럼 법궤 그것이 무엇이라고 사람을 죽게 만드나?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고 복종하고자 하는 자세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호기심으로 인해 그들은 죽게 되었다.
하나님의 말씀이 아벳 전투에서처럼 부적처럼 쓰여져도 책망받을 일이며
벳세메스 사람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호기심으로 감탄하라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이 모두가 책망받을 일이다.
농부가 나무를 심어놓고 기쁜 것이 아니라 열매를 보아서 기뻐한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삶속에 말씀이 실천되어질때 순종되어 질 때 하나님은 기뻐하신다.
그리하여 법궤는 기럇아르바의 아미나답이라는 사람의 집에 70년이나 보관을 하게 된다. 그 물건이 너무 무서운 물건이라 70년 동안이나 이곳에 보관되어진다. 그후에 이스라엘의 다윗왕이 웃사의 집에서 하나님의 법궤가 수레에 실려 이스라엘로 옮겨지게 된다. 제사장들이 왕에게 성경의 말씀대로 법궤의 네개의 고리에 꿰어 레위지파 고핫자손으로 메게 해야한다고 말하지만 웃사와 아효의 그들의 권위에 눌려 수레에 실은 채로 옮기게 된다. 그러다가 수레가 기울어져 나곤의 마당에서 법궤가 흔들리자 웃사가 법궤를 잡자 잡는 순간에 즉사하게 된다. 아효는 그 일을 이해할 수 없었다.
웃사가 법궤를 잡다는 히브리 원문 표현은 '내 소유처럼 여겼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웃사는 왕도 보고있고 백성이 보고 있는 그 자리에서 자기꺼야 라고 하는 생가을 꾸짖으신것이다. 혹시 말씀을 내려다 보고 있지는 않는가? 내가 성경위에 있지는 않는가? 웃사가 손을 댄 것이 문제가 아니고 말씀에 대한 자세가 심각한 문제였다. 말씀을 독점적으로 소지하고 있으며 자신이 말씀을 전하는 자라 할지라도 말씀은 우리 위에 있어야한다. 교회의 주인은 절대 되어서는 않된다. 이곳이 하나님의 집인 것을 믿을 진대 이 곳에 있는 풀 하나 꽃 하나도 내 소유라 생각하면 않된다. 소유가 아니라 청지기로 살아야 한다.
어느 순간에 말씀에 함부로 손댔다가 웃사와 같은 벌을 받게 될 지 모른다.
다윗은 이 사건을 보고 웃사를 베레스 웃사라 하며 분노하였다. 다윗은 말씀 앞에 무릎꿇고 말씀 앞에 겸손해야겠구나 하고 분노하였다. 말씀대로 살지 못하는 자신을 향해 화내고 분노해야 한다.
그때 하나님이 나에게 복주시고 하나님의 평강을 내려주실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부적도 호기심의 대상도 아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마태복음 5장 8절)"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 하라"(8절)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하여 이 모든 자연현상이 이어지고 있으며 우리의 삶도 연장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창조의 질서의 말씀으로 오늘의 나도 이 자리에 있는 것이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하다.
엘리가 제사장으로 있을 때 전쟁이 일어났는데 그때 전쟁터에서 이스라엘군 4000병이 죽게되는 위기가 닥친다. 그때 전장에 장군으로 있던 엘리의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이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실로에 안치되어 있는 법궤를 가져오고자 한다. 그들은 법계가 이스라엘의 위대한 하나님의 승리의 도구라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레위 지파의 고핫자손들이 법궤를 메고 전쟁터로 나가게된다. 법궤를 본 이스라엘 백성들이 얼마나 감격을 했는지 땅이 진동할 정도라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 한편 이들의 반응과 상관 없이 블레셋군대는 전세를 몰아가고 있었는데 어찌 된 일인지 법궤가 있음에도 이스라엘 백성은 3만명이 죽어나갔으며 장군 홉니와 비느하스도 죽고 법궤마저 블레셋군에게 빼앗기며 군은 뿔뿔이 흩어졌다. 이 소식을 들은 엘리가 목이 부러져 즉사하며 그의 자부가 사산하게 되었다.
하나님의 임제의 상징인 법궤가 이스라엘의 승리를 상징한다는 그들의 믿음은 가상하게 보일 수도 있으나 하나님은 그들의 잘못된 신앙을 지적해 주고 있다.
법궤는 부적이 아니다. 성경이 있으니 믿음이 있을 것이다는 착각을 하면 않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을 육비에 새길 뿐 아니라 심비에 새기라 하셨다. 하나님을 믿으니 우리집이 잘 될 것이라는 생각은 잘못된 것이다.
말씀은 듣고 지키라고 주어진 것이지 부적처럼 쓰라고 주어진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우상처럼 부적처럼 사용하면 않된다. 성경을 잠잘 때 베고 누워자버리면 그 성경은 목침에 불과하다.성경은 부적이 아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법궤가 능력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상당히 잘못된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주어지는 이유는 듣고 순종하라고 지키라고 주시는 것이다. 말씀 때문에 우리가 그렇게된 것이라면 우리는 말씀대로 살아야한다는 뜻이다.
우선 적으로 우리의 모습을 살피때 세상 가운데서 우리의 삶을 먼저 살피라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한편 법궤를 가져간 블레셋은 그들의 신전 다곤 신 옆에다 법궤를 가져다 두었는데, 다음날 다곤 신이 넘어져 있는 것을 보았는데 다음날은 앞으로 꼬꾸라져 있고 피괴되었으며 그 지역에 독동이 퍼져서 그들이 회의를 하여 법궤가 이유임을 찾아내게 된다. 그래서 그들은 법궤를 이스라엘에 돌려주기로 결정한다.그들은 법궤를 수레에 실어서, 짐을 실어날라 본 적이 없고 젖을 떼지 않은 암소 두마리에 실어 벳세메스로 보내기로 한다. 그들이 가기는 가는데 그 소가 울면서 갔다. 마음도 갈마음이 없고 수레를 끌수 있는 기술이 없는 소 들이 그들이 베세메스로 곧장 갔다. 그것을 본 블레셋은 이스라엘 신은 당할 수가 없음을 인정한다. 이스라엘 땅이지만 블레셋의 지배를 받던 벳세메스 사람들은 수레를 몰고 자신의 성으로 돌아가게된다. 법궤를 본 벳세메스 사람들은 번쩍거리던 법궤를 들여다보고 열어보기로 결정한다. 모세 당시에 만들었던 법궤를 그 후에는 본적이 없었는데 그들은 안을 들여다보고 싶은 호기심에 뚜껑을 열었는데 여는 그순간에 즉시 70명이 그 자리에서 죽게 된다.
법궤 뚜껑을 열어서 죽게되었다. 그럼 법궤 그것이 무엇이라고 사람을 죽게 만드나?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고 복종하고자 하는 자세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호기심으로 인해 그들은 죽게 되었다.
하나님의 말씀이 아벳 전투에서처럼 부적처럼 쓰여져도 책망받을 일이며
벳세메스 사람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호기심으로 감탄하라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이 모두가 책망받을 일이다.
농부가 나무를 심어놓고 기쁜 것이 아니라 열매를 보아서 기뻐한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삶속에 말씀이 실천되어질때 순종되어 질 때 하나님은 기뻐하신다.
그리하여 법궤는 기럇아르바의 아미나답이라는 사람의 집에 70년이나 보관을 하게 된다. 그 물건이 너무 무서운 물건이라 70년 동안이나 이곳에 보관되어진다. 그후에 이스라엘의 다윗왕이 웃사의 집에서 하나님의 법궤가 수레에 실려 이스라엘로 옮겨지게 된다. 제사장들이 왕에게 성경의 말씀대로 법궤의 네개의 고리에 꿰어 레위지파 고핫자손으로 메게 해야한다고 말하지만 웃사와 아효의 그들의 권위에 눌려 수레에 실은 채로 옮기게 된다. 그러다가 수레가 기울어져 나곤의 마당에서 법궤가 흔들리자 웃사가 법궤를 잡자 잡는 순간에 즉사하게 된다. 아효는 그 일을 이해할 수 없었다.
웃사가 법궤를 잡다는 히브리 원문 표현은 '내 소유처럼 여겼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웃사는 왕도 보고있고 백성이 보고 있는 그 자리에서 자기꺼야 라고 하는 생가을 꾸짖으신것이다. 혹시 말씀을 내려다 보고 있지는 않는가? 내가 성경위에 있지는 않는가? 웃사가 손을 댄 것이 문제가 아니고 말씀에 대한 자세가 심각한 문제였다. 말씀을 독점적으로 소지하고 있으며 자신이 말씀을 전하는 자라 할지라도 말씀은 우리 위에 있어야한다. 교회의 주인은 절대 되어서는 않된다. 이곳이 하나님의 집인 것을 믿을 진대 이 곳에 있는 풀 하나 꽃 하나도 내 소유라 생각하면 않된다. 소유가 아니라 청지기로 살아야 한다.
어느 순간에 말씀에 함부로 손댔다가 웃사와 같은 벌을 받게 될 지 모른다.
다윗은 이 사건을 보고 웃사를 베레스 웃사라 하며 분노하였다. 다윗은 말씀 앞에 무릎꿇고 말씀 앞에 겸손해야겠구나 하고 분노하였다. 말씀대로 살지 못하는 자신을 향해 화내고 분노해야 한다.
그때 하나님이 나에게 복주시고 하나님의 평강을 내려주실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부적도 호기심의 대상도 아니다.